우리는 디자인을 기업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형상화하는 기술의 일종으로 생각하며 갑과 을의 종속개념으로 인식해 왔다. 때문에 기업의 기술, 부품, 기능, 구조, 생산조건 등을 미리 정하고 거기에 약간의 아이디어를 가미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지극히 눈에 보이는 현실에 기반한 기업중심의 근 미래 시장 추종형 디자인이다.
선행디자인이란,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예측하고 디자인의 주요 능력인 통합력, 분석력, 기획력 그리고 창의력을 중심으로 상품전략과 컨셉트를 개발하고 구체화하여 기술, 생산, 마케팅, 영업, 사후관리 등 기술과 시스템을 디자인에 맞게 개발하는 것으로 기업의 모든 요소를 다시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선행디자인은 기업이 만들어 놓은 미래를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자 중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미래 시장 선도형 디자인이다.
미국 애플사의 PC와 MP3 플레이어 모델이 시장판도를 완전히 바꾸고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매김했던 것은 수년에 걸쳐 개발한 선행디자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장 추종 형의 디자인만을 바라보는 많은 기업들의 수십, 수백 개의 모델로도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선행디자인이 효과적으로 진행되려면 기업의 능력 및 제반 상황 등 경영의 필요충분조건이 요구되며 디자인에 대한 가치를 높이 살 수 있는 사회 전반적인 인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새로운 디자인의 MP3 플레이어를 준비한다고 할 때 투자할 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다담디자인은 90년대 중반부터 정보통신기기, 화장품, 가전제품, MP3, 블루투스 응용상품 등 자체 투자에 의한 선행디자인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으며 성공사례들이 알려지면서 기업은 물론 정부에서도 선행디자인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당시 '페이저'(일명 삐삐)가 커뮤니케이션 기기로 각광을 받을 무렵 21세기의 개인용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나 기기들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예측하기 위한 PCA(Personal Communication Assistants) Project를 선행디자인 방식으로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지금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게 예측되었다. 당시에 모토롤라 디자인 메니저가 ‘디자이너가 예측하는 21세기 페이저’ 개발의뢰를 위해 다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서로가 놀라움과 기대를 갖게 됐다. 나는 모토롤라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은 선행디자인 프로그램이 정착되어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고 모토롤라 관계자는 자기네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이미 한국의 디자인기업이 풀어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모토롤라는 국내에 디자인센터를 설립하였다.
그 후 휴대폰 붐이 일기 시작하던 2000년 전후에 다담은 휴대폰의 미래를 제안하고자 2000년부터 매년 2회에 걸쳐 선행디자인을 개발해 오고 있다. 이것은 PCA 프로젝트의 연장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가 ‘튀어 나와 있는 휴대폰 안테나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였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안테나가 안 보이는 인테나 폰이었다. 당시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모두가 개발을 꺼리는 상황에서 벨웨이브라는 회사가 기꺼이 다담의 디자인을 사용하여 1년 이상의 개발노력 끝에 최초의 인테나 폰이 상용화 되었고 국내외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 받고 중국에서 최고가 상품으로서 수년간 시장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선행디자인을 국내 기업에 소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국내 모 대기업에 다담의 선행디자인 휴대폰을 함께 개발해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 당한 경험이 있는데, 만일 관심이 있더라도 내부 결정단계와 시간, 조건 등이 매우 복잡하며 외국과 같이 의사결정권자를 직접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간신히 기회를 만들었다 해도 디자인만 공개하고 마는 결과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담의 경우는 주로 외국기업들만 접촉하고 있다.
최근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선행디자인을 추진하거나 디자인기업과 협력하는 기업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디자인기업과 협력하는 경우, 평가와 보상측면에서는 아직도 미흡하기 때문에 디자인 기업들은 진정한 선행디자인의 개발이 어렵다. 기업은 일시적인 이벤트성의 선행디자인이 아닌 장기적으로 기업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계획된 투자노력이 요구된다. 선행디자인은 디자이너를 위한 것이 아닌 기업의 고객인 생활자들을 위한 것이며 그 결과가 기업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기업들은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고 기술보다는 감성이 중시되는 최근의 변화는 디자인이 주목 받는 이유이며, 선행디자인 전략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감으로써 대한민국을 경제는 물론,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 보자.
200709 / 한국경제신문 Prosumer